착착착 Chack Chack Chack

클리나멘 3인전, 맺음 갤러리, 서울예술치유허브, 2017

전시 [착착착]에 동참하며 /이수영(미술작가) 2017.10.18

1. 어긋날 착: ①어긋나다 ② 섞다, 섞이다

김현주는 숲으로 갔다. 푸른 숲 사이로 밝은 햇살이 쏟아진다. 초록 잎사귀들이 빤짝거린다. 음영이 갈리는 그늘 속엔 녹황색 양치식물들이 축축한 땅을 덮고 있다. 축축하고 보드랍고 달콤한 흙냄새가 난다. 다가간다. 손을 뻗는다. 만지고 싶다. 어? 벽이다. 딱딱한 벽에 초록색과 노란색 빛들이 마치 숲처럼 보이도록 맺혀있다. 빔 프로젝터다.

시각은 환영을 만든다. 촉각은 허구에 침입하는 현실이다. 미술관은 환영들의 집이다. 거대한 액자이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까마귀가 나르는 밀밭은 시각적 환상이지만, 울퉁불퉁하고 딱딱하게 말라붙은 물감들은 촉각적 본능의 운명이다.

김현주가 숲 속에 서있는 사진이 보인다. 푸른 숲이 보인다. 숲에 조용히 고여 있는 햇볕이 보인다. 한적한 오후 조는 듯 잎사귀들이 보인다. 김현주가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보고 싶다. 다가간다. 어? 소리가 들린다. 웅성웅성, 부시럭, 쏴아, 포로록. 그러고 보니 미세하지만 나뭇잎이 움직이고 있다. 소리 때문에 사진(still)이 아니라 동영상인 것을 알았다. 소리는 멈춘 것을(still) 움직이게(동영상) 한다.

청각은 시각보다 원형적이다. 소리는 사건으로 쳐들어온다. 보고 싶지 않을 땐 눈을 감으면 되지만 듣고 싶지 않을 때 귀를 닫을 수 없다. 시각은 개념적이지만 소리는 현장적이며, 시인의 노래는 불온하고, 슬픈 노래는 반성적 능력을 마비시키며 찰나에 우리를 사로잡는다.

김현주는 모든 감각을 착종(錯綜)한다. 어긋나게 하며 섞는다. 소리를 위해 시각적 움직임을 최대한 제거하면서 한편 정지한 그림들(still)로 움직이는(animated)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2. 붙을 착: ①붙다 ②시작하다

이재원은 그날 오후 약속한 친구 집에 갔다. 오랜만이라며, 잘 지냈냐며 서로 인사를 하고, 차도 한잔 마시며 친구에게 말한다. “전화로 설명한 것처럼, 이달 말에 전시가 있는데, 진짜 사람 손을 캐스팅해서 전시장 벽에 설치해야 하거든, 네 손 좀 줘봐봐.” 친구 손을 잡는다. 따뜻하다. 말랑말랑하다. 그 따뜻한 손에 석고를 바르고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그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친구, 후배, 선배, 지인들의 손은 이제 손 모양을 한 딱딱한 석고덩어리가 되어 전시장 벽 이곳저곳에 클라이밍 홀드가 되어 붙는다. 이재원이 그 손들을 잡고, 그 손에 몸의 무게를 맡기며, 벽 위를 걸어 올라가는 클라이밍 퍼포먼스를 할 것이다. 내 몸을 온전히 맡기며 벽 위로 오르기 위해선 따뜻하고 말랑한 손은 딱딱하고 단단한 사물로 변해야 한다. 그 든든한 사물은 집에 찾아가고 안부를 묻고 차를 마시고 손을 잡는 관계 속에서만 만들어 질 수 있다. 그 관계가 이재원을 벽 위 위험하고 낯선 곳에서 걷게 해준다. 관계의 산물을 변화시켜 지루하도록 익숙한 땅을 버리고 위험하고 새로운 벽 위를 걷는 것, 변화가 시작되려 한다.

그러나 전시장은 현실이 아니다. 환영(幻影)을 위한 곳이다. 전시장 벽은 이재원의 변신을 허락할 정도로 견고하지 않다. 클라이밍을 할 정도로 견고하지 않은 전시장 벽에, 진짜 클라이밍 하는 사진을 붙이기로 한다. 변화의 원망(願望)은 재현될 때만 미술 전시장에 붙을 수 있는 것일까. 이재원은 못한 것을 의자가 했다. 이재원은 의자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일어설 수 있게 했다. 의자들은 바닥에 붙은 두 다리를 허공으로 들어 올려 두 다리 만으로 섰다. 이재원이 지인들의 도움으로 바닥을 버리고 벽을 걷고 싶어 했듯이 의자들은 이재원을 믿고 바닥을 버리고 두 다리로 섰다.

3. 응답할 착: 응답하다 큰소리

강현아는 집안을 휘 둘러본다. 마치 다른 사람 집에 온 듯 하나하나 애써 본다. 화장실 바닥에 물기가 남은 플라스틱 대야가 있다. 대야 옆에는 반쯤 물에 젖은 샴푸통이 있다. 책상 위엔 비타민 병, 로션, 스킨, 영양크림, 핸드크림이 나란히 있다. 책상 옆엔 바닥과 천장을 양쪽으로 밀어 버티고 있는 옷걸이 기둥 두개가 있다. 그 사이를 가로 지른 옷걸이엔 철 지난 옷 몇 벌이 여전히 그 자리에 걸려있다. 이게 나다.

동기감응(同期感應). 같은 기운은 서로 응한다. 통한다. 연결된다. 중국 한나라 때 성립된 음양오행론의 한 이론이다. 조상을 모시는 유교문화와 어우러져 조상을 좋은 묘자리에 모시면 같은 기운인 후손이 잘된다는 음택풍수(陰宅風水)이론의 세속적 믿음 속에서 과장된다. ‘도(道)를 아십니까.’ 동기감응과 음택풍수 문화에서 개발된 현대적 발복(發福) 신앙의 신종 상술이다.

강현아는 도(道)를 아시냐는, 조상과의 동기감응을 통한 발복의 기회를 안내하겠다는, 흔한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발복을 원한다. 조상을 모시기로 한다. 하지만 도(道)를 아는 그 전도사를 따라 가지 않고 집으로 간다. 매일 쓰는 익숙한 물건들로 조상을 모시기로 한다. 플라스틱 대야에 맑은 물 떠 놓고, 화장품병과 샴푸통으로 조상들 곡두를 만들고, 옷걸이 기둥에 옷을 감아 이주문(二柱門)을 만들어 출세간(出世間)과 세간(世間)을 나누고, 화장지로 불경 경통을 만드는 식이다.

일상의 물건이 재생(rebirth)된다. 변신한다. 가까웠던 그 물건들은 강현아의 간절한 발복 의지를 만나 동기감응의 몸체 즉 미디어가 된다. 같은 기운(氣運)이라서 응답하는 것이 아니다. 순서가 바뀐다. 감응하면 같은 기운이 되는 것이다. 같은 것끼리 응답하는 것은 얼마나 쉽고도 지겨운 일인가. 다른 것, 차이나는 것과 감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매력적인 일인가. 다른 세계를 여는 변화의 도(道), 그 도(道)를 강현아는 아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