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art magazine_october 2010

영화 <매트릭스>에는 많은 철학자의 이론이 등장한다. 그 사상들은 영화의 골조로써 허구로 여겨질 수 있는 상황을 사실로 둔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시옹(simulation)’ 이론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워쇼스키 형제는 주인공 네오에게 <시뮬라시옹>이라는 책을 들게 하거나, “네오, 너는 꿈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온 거야. 보드리야르의 말처럼”이란 대사를 언급하게 하는 식으로 그에 대한 경의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내용과 감독의 의도가 보드리야르의 이론에 기초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언들이다.

한편 경계가 모호해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매트릭스>는 시종일관 관객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재하는가?”라고.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그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에 대한 연구인 ‘시뮬라시옹’ 이론은 기술공학이 발전되고, 사이버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가상과 현실이 동일시될수록 대중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가상이 실재로 여겨지고, 실재와 가상이 동일시되는 것, 그 사이의 간극 역시 이재원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하는 핵심 주제이다.

이재원의 작업은 인간의 존재에 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원론적 의문은 꼬리를 물며 삶의 가치와 죽음, 겉은 복잡해보이나 텅 빈 사회, 예술, 작품을 만들고 담론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과정을 겪든 결론은 언제나 ‘인간’으로 돌아온다. 실존에 대한 고민과 존재에 대한 집착, 신과 인간을 저울질하는 것조차 생각의 주체가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가에게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물음의 경로이며, 작품은 그 시간을 착실히 기록하는 매개체랄 수 있다. 

음의 경로이며, 작품은 그 시간을 착실히 기록하는 매개체랄 수 있다. 예를 들어 초기 작품인 <Brain>시리즈는 축소된 크기의 뇌 형태를 규칙적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작가는 학교라는 사회의 축소판에서 소위 엘리트로 치부되었던 이들과 시간이 지난 후 마주했다. 그리고 작가는 개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그들 역시 20대가 갖는 보편적인 고민과 불안을 안고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서 작업의 단초를 얻은 작가는 규격화된 이들을  ‘뇌’ 모양(신체 중 가장 핵심적 기능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빗대어 표현했다. 현대적 건물이나 기둥을 연상시키는 구조와 뇌형태인 개체의 결함은 인간이 더 이상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서가 아닌 거대한 사회를 구성하는 부품으로 은유된다. 대량으로 복제된 이미지는 개인보다는 체케를 완성하는 것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는 사회의 단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도구가 된다. 격변하는 사회에 고유한 가치를 묻는 것, 이재원이 말하는 메시지는 ‘구조’와 개체’라는 요소를 통해 최근작에서 더욱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Cell> 연작은 투명 아크릴 판을 겹쳐 그 안에 걷거나 뛰는 등 일상적인 인체 형상을 나타낸 것이다. 무중력 상태에서 부유하는 모습,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은 작가 자신이나 관람객 등 익명의 누군가의 모습을 대변한다. 형태를 구성하는 각각의 큐브들은 하나의 공간이나 개인을, 큐브들의 합 역시 사회 전체를 뜻한다. 공간 안에서 좌표 역할과 형상을 동시에 나타내는 아크릴 조각들은 난반사로 더욱 환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모호한 형상은 의도된 공간 속으로 완성된 디지털 기호처럼 인식된다. 

흥미롭게도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는 ‘실재의 가상화’라는 화두는 작업 진행과정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작가는 초기 단계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모습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대략전인 형상으로 만들고, 이를 다시 간략한 모습으로 분해해 수학적 좌표 값을 얻는다. 실재가 프로그램으로 옮겨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치며 두 요소는 혼재된다. 실재 세계가 그렇듯.

실재와 가상이 뒤섞인 현상이 명백한 사실이 되고, 체계적으로 디지털화된 현실에서 무절제한 이미지 복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과학이 발전하면서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이를 두고 이재원은 “두 요소의 공존은 우리의 모습이며, 여기에 현대사회와 인간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허나 모든 가치가 몰락할 때 사람들이 확실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사회가 혼란할수록 체계를 유지시킬 수 있는 절대적 가치가 필요하다. 작가는 이를 유일한 존재, 즉 인간에 대한 확신이라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실존에 대한 이야기를 의문으로 풀어간다. 나아가 그 의문은 작업뿐 아니라 작가 자신을 한층 단단하고 야무지게 다듬는 용제가 되고있다. 

 

글 이혜린 기자, 사진 서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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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릭아트 선정작가 2010년 10월호